무언가 고민될 때, 오후 10시
님 안녕하세요! <오후 10시>입니다.
오후 10시는 이름처럼 매주 수요일 오후 10시에 발송되는 뉴스레터인데
이젠 금요일에서 토요일 넘어가는 오전 2시에도 뉴스레터를 보내고 있어요!
늦은 밤 잔잔한 이야기들을 전해 드립니다.
키워드 노트는 제가 쓴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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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
로컬
* 시골이라고 표현하긴 그렇고, 지방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그렇고, 지역이라는 말은 좀 슴슴할 때 사용하는 단어. (뇌피셜)
이번 주 키워드는 로컬입니다.
제목처럼 여러분들은 살아보고 싶은 동네가 있으신가요? 아니면 살아보고 싶은 나라라던지... 저는 언젠가 꼭 자연자연한 동네에서 살아보고 싶어요. 너무 중심부도 아니고 너무 외곽도 아닌 적당한 위치에 있는 지역에서 말이죠!
생각해 보면 서울에도 그런 동네는 충분히 많은 것 같습니다. 대신 회사를 가기에 힘든 위치라서 약간 어려운 점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래서 전 꼭 무조건 서울에 살아야 할 수 있는 것들은 안하고 싶어요. 누구나 그럴 수도 있지먼 다양한 동네를, 지역을 경험하고 싶은데 일을 위해 서울을 고집해야 한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어제 날짜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퇴근하고 주 2회 뉴스레터를 잘 운영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만 일단 최대한 한번 해볼게요... 언제나 주 1회로 바뀔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대신 더욱 좋은 이야기들을 찾고 담기 위해 더더욱 노력하겠습니다 🤩
님 오늘도 뉴스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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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콘텐츠 요약
1. 키워드 노트
2. 지방에도 이름이 있다
3. 난 지방에서 살아야 할 운명일까?
4. 남쪽으로 튀어
5. 소멸위기 지역에 주민등록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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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로컬이라는 단어를 하도 많이 들어서 쓰고 싶진 않지만 무언가 시골이라고 표현하긴 좀 그렇고 그렇고 지방이라고 표현하자니 그것도 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보니 로컬이라는 단어로 이어졌다.
저번에 출퇴근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음의 단어는 로컬로 이어졌다. 출퇴근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로컬 로컬~한 삶을 살고 싶은 느낌…?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자연 속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다. 나한테 잘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지만 한 번쯤은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나중에 여유가 있으면 꼭 2주 살기나 한 달 살기를 해보고 싶다.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통영같은 바닷가 근처 도시나 근처에 풀이 가득하고 조용한 그런 도시.
물론 짧게 살아보는 것과 그 지역에 정착하는 것은 다른 무게를 가질 것이다. 잠깐 떠나는 여행은 즐겁지만 막상 정착해 살아보면 여행을 할 때는 보이지 않던 다양한 문제들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으니…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일이다. 만약 재택을 100% 할 수 있는 기업이 있다면 그런 기업에 취직을 하는 것도 방법일 수도 있고 회사에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물론 직장에 속해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서 회사에 다니고, 직무들을 경험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이후에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다. 내가 회사에서 벗어났을 때, 직장의 영향력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이라면 굳이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다.
어떻게든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하려고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회사에서 만들 수 있는 콘텐츠도 있고 나 혼자서 만들 수 있는 콘텐츠가 있듯이 회사에서 배운 걸 개인에 접목시키기도 하고 혼자서 콘텐츠를 만들면서 배운 것들을 회사의 일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시너지가 생기기도 하고 결국 이런 선순환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자영업을 할 수도 있고 알바를 하면서 살 수도 있지만 모든 경험들은 콘텐츠의 소재로 이어질 수 있으니 뭐든 좋지 않을까?
로컬이라는 키워드는 결국 일을 하고 경력이 쌓였을 때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가깝다. 물론 서울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서울이 아니면 안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원해서, 정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아직까진 남아 있다. 언젠가는 깎이고 깎여 무뎌지는 순간도 오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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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지방에도 이름이 있다
브런치 자유님의 글
미끌미끌한 촉감의 선크림을 그렇게 싫어했던 사춘기 시절, 어린 동생과 함께 여름방학이 되면 경기도 B시의 고모네에 며칠을 묵었다.
고모는 나와 동생을 '시골에서 왔어'라고 소개했고 나는 광주는 시골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았다. 그때도 광주는 광역시고, 고모네는 경기도에 속하 B시였다.
경기도민에게 도시와 시골의 경계란 서울과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일까, 어렴풋이 생각했을 뿐이다. 버스를 한참 타고 나가야 시가지가 보이던 당시의 B시였지만 그들에게 나는 시골 애였다.
시간이 흘러, 엄마를 사랑하는 장녀는 세상의 순리대로 할머니를 적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런 장녀와 고모의 관계란 큰 무리 없이 언제나 나쁜 쪽으로 흘렀다.
할머니 집이 있는 전라남도 C군은 시골이었다. 인도 없는 논밭 사이의 2차선 옆 정류장에는 하루에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이 쓰여 있었고, 집 한 편에 작게 과자 몇 개를 놓고 파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있다가 사라지던 마을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할머니 것일지 모르는 넓은 논과 감나무밭, 해가 쨍쨍할 때 따야 한다며 땡볕에 끌려가던 고추밭, 비닐하우스, 이름 없는 개울, 작은 계곡, 마을을 둘러싼 산뿐이었다.
시골은 한국의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당한 채로 하위 영역을 차지하다 결국 부정적인 가치들을 모두 끌어안게 되었다.
시골은 발전되지 않음을 이유로 낙후, 고령화, 소멸, 촌스러움, 혹은 도시의 반대항으로서 조용하고 공기 좋은 살기 좋은 공간으로 타자화되었다.
광주는 시골이 아니라 지방이었지만, 지방 사람인 나의 선언은 유효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떠나야 했다. 지방 거점 광역시임에도 불구하고 시골이라고 불리던 광주에서 벗어나, 나는 비-지방민이 되고자 했다.
수도권이라는 통칭으로 서울, 인천과 헐겁게 묶여 있는 경기도 남부 A시에서 첫 직장을 가지게 되었을 때, 혈연과 지연 그리고 학연, 그 무엇으로도 엮이지 않은 새로운 도시에서 어느 정도 홀가분했고 그만큼 외로웠다.
나고 자란 광주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처음으로 나온 바깥은 서울은 아니었지만 유사하게 서울과 가까웠다. 고모의 말은 언제나 나를 찌르고 있었기에, '그놈의 경기도'가 얼마나 도시인지 두고 보자는 마음은 논을 보고서야 사그라들었다.
당시 경기도 A시는 농업인구가 더 많은 시골이었지만, 나는 어린 시절의 고모와 정확히 같은 논리로 그곳을 시골로 부르는 일을 꺼렸다.
서울과 가까워지고 싶은 열망이, 결국 서울이라는 표면장력에 속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부지런히 왕복 2시간이 넘는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버리면서 '올라왔다'고 말했다. 그러한 무의미한 방향성을 바보같이 믿었다.
상경한 경기도 A시의 생활은 벅찼고, A시를 떠돌며 약 5년을 버텼지만 A시는 고향에 준하는 안정감을 줄 수 없었다.
광주에서 위로 올라왔지만 여전히 시골인 이곳에서, 나는 지방민도 비-지방민도 아니었다. 서울은 계속해서 나를 내치는 것만 같이 너무 컸고 높았고 두려웠다.
광주를 떠나고 싶어 하던 이유가 정확히 다시 내가 광주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일자리가 없고, 급여가 적고, 문화생활을 즐기기가 어렵다는 이유가 광주를 다시 쓰도록 나를 종용한다.
광주는 도대체 어떻게 불려야 할까? 대형 서점이 두 개뿐이고 소극장도 몇 개 되지 않는다. 미술관도 전시장도 서울에 비해서 열악한 수준으로 수가 적다.
그러나 내가 겪은 광주는 전라도의 청년이 유입되는 공간이며, 국내 유일 2층 단관 극장인 광주극장에서 영화 보는 맛이 있는 도시이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광주 비엔날레가 높은 수준의 전시 및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예향 도시다.
그리고 오월이 되면 고요한 소란이 이는 근대역사를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5.18 민주화운동 최후항전지인 구도청의 층수를 넘기지 않기 위해 지하로 층을 내려 지은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의 뜻을 생각하면서 이 지방 도시와 새롭게 맺어 나갈 관계를 기대하게 된다.
지방에도 이름이 있다. 내가 사는 광주는 주체에 의해 호명된 바로 그 촌스러운 '오메'이며 사랑하는 '광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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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2
난 지방에서 살아야 할 운명일까?
브런치 내일 여기에서님의 글
사실 나는 사춘기를 맞이할 즈음부터 고향을 떠나고 싶어 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특별해 보이고 싶었던 거였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때의 나는 그랬다.
그때와 비슷한 답답함을 나는, 이십 대 중후반에 또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원만했으나, 어딘가 가슴이 텅 빈듯한 공허함이 항상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건강한 부모님, 안정적인 직업, 안정적인 주거환경 등 일종의 행복의 조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다 충족된 상태에서 나는 또 탈출을 원했다.
나의 고향은 공무원의 월급으로도 대기업 브랜드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을 정도로 집값이 괜찮다. 또한 일자리도 풍부한 편이며 지방 중소도시 치고는 지역들의 인프라가 좋은 편이다.
그렇지만 나의 스무 살까지 인생을 돌아봤을 때, 항상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던 터라 이곳에서 언젠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동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점을 반면교사 삼아 나보다 더 나은 학창 시절을 지낼 수 있게 할 수도 있었다.
그즈음, 나는 친구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결혼을 핑계 삼아 고향에서 다른 소도시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아주 막무가내였다. 새로 옮겨 간 소도시는 무려 '군'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아주 소도시였다. LH사건의 주인공이 된 동네이기도 하다.
동네에 행복주택과 신혼 희망타운을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었으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시골 동네에 새로운 단지를 만들었으니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출퇴근에 대한 방법을 찾으면서 나는 출퇴근 시간보다 나의 리턴이 더 크고 가치 있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시간당 가치는 얼마일까. 이게 나의 최선일까. 이 회사에서 이 일을 하기 위한 댁사가 이게 맞는 걸까. 나는 그 댓가를 받을만한 일을 하는가 등 일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들었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조금 더 나아가서, 이 회사의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생산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어떻게 측정이 될까, 그 가치를 더 키우고 싶으면 난 무얼 해야할까.
만약 그게 어렵다면 나의 또 다른 가치창출 방법은 있을까? 또 다른 생산 수단이 있을까 등 생각을 확장해보니까 기분이 복잡미묘해졌다. 그렇지만 우선 나는 최적의 출퇴근 노선과 시간을 정해서 적응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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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3
남쪽으로 튀어
브런치 이웃주민님의 글
서울에서 사십해를 살고, 불혹 즈음하여 고흥으로 왔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생의 층계에서 비틀대고 있었는지 모른다.
겉보기에는 바쁘고 과거보다 쿨해보이고 심지어 더 건강하고 여유 있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나의 내적인 추동은 젊은 날보다 휘청거리고 불안정하고 한곳에 모이지 못한 채 갈지자로 흩어졌다.
중년의 위기라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영역을 넘나 든다. 객관적으로 잘 살고 별 문제없어 보이더라도 위기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유가 있기도 없기도 하다.
변화를 꾀하기도 훌훌 털어내는 것도 여의치는 않다. 해본 것, 익숙함, 경험의 축적은 가끔 어른으로의 진화를 이루지만, 꽤 자주 변화를 짓누르고 진부함을 잉태한다.
일터에서 로컬 사업을 준비하고 열심히 해서 성사시킨 계기가 첫 번째지만, 고흥행의 이유가 더 떠오른다.
'평생 도시와 서울에서만 산다? 별로 재미없지 않은가...' 여전히 나에게 나에게 모험심이란 게 있었던 걸까. 귀촌을 목적에 두진 않았다. 차라리 노마드적 호기심과 결행에 가깝다.
커뮤니티와 주민, 여행과 나그네로서의 삶을 조화로이 엮어서 살길 바라왔다. 고흥행은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었다.
'할머니, 그리고 나의 뿌리가 깃든 곳!' 도시로 도시로 줄줄이 향하던 이촌향도의 시기에 가족들은 상경했고, 바야흐로 지역소멸 위기감이 고조되는 때에 나는 최남단의 땅으로 턴해 돌아왔다.
평생 서울에서 살았지만,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고흥의 말투, 정서, 음식과 함께 컸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고흥은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고흥이라면 제가 가보겠습니다!"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새로운 삶, 살아보지 못했던 일상과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먼 곳 아니겠는가! 여행도 멀리 떠나야 여행온 맛이다.
서울과 멀다, 멀다, 멀다... 저 머나먼 곳이야 말로 나의 경험치를 능가하는 미지와 동경의 터다. 거리감만큼이나 생활양식, 문화, 자연환경 모두 같은 하늘아래 차원을 달리한듯한 다른 곳에서 두 번 인생을 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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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4
소멸위기 지역에 주민등록을 하다
브런치 이웃주민님의 글
센트럴시티에서 고흥행 고속버스로 서울을 떠나며.. 올해 7월은 내게 여러모로 특별한 달이다.
만 나이 통일을 한다고 해서 잠시나마 30대로 슬쩍 돌아갔는데, 7월생인 나는 며칠 안가 다시 앞자리 숫자가 바뀌었다. 아무리 붙잡으려 용써도 나의 청년기는 흘러가는구나.
서울 주민으로서의 마지막 시간을 부여잡는 날들도 이제 멀어져 간다. 고흥 일은 본격화 중이고, 오늘은 몸만 내려가지만 모레면 왕창 짐 싸들고 내려와 둥지를 튼다.
과잉과 혼잡 혹은 다양성이 교차하는 대도시 한복판 동네에서, 감소와 정적 혹은 대자연의 풍요가 대비되는 반도 끝 남도로 향하는구나.
그래봐야 같은 코리안 하늘 아래고 내려가더라도 종종 들르겠지만, 일단락 지으면 막장을 넘기는 순간이 주는 감정의 동요가 있다.
모두 퇴근하고 텅 비어있는 일터, 서울 사무실에서도, 자주 무미건조하게 오가며 쳇바퀴같이 느끼던 곳. 짐 싸들고 나오다가 멈춰 섰다.
비어있는 동료들 자리에 하나씩 길게 눈길을 남긴 채, 안녕, 여기도 멀어지겠구나... 생각하며 어둑해진 보문로 거리로 나왔다.
결국, 마침내, 7월부로 고흥군 주민이 되었다. 이사하고 읍사무소에 들러 전입신고까지 마쳤으니 여하튼 쉽게 되돌리기 힘든 '빼박' 상황이 된 셈이다.
이삿짐이 좀 정리되니, 이제 사람 사는 집 같아지고 있다. 고흥터미널 근처에 전셋집을 얻었는데 가까이에 편의점, 마트, 카페, 식당, 병원 등등 다 있어 아직 불편한 건 없다.
물론 거리가 전반적으로 올드한 분위기이긴 하다. 굳이 레트로 감성을 흉내 내려고들도 많이 하는데, 여기는 그 자체로 과거의, 사라진 줄 알았던 여전한 간판, 상점 분위기가 꾸며지지 않은 채로 그득하다.
서울을 준거점으로 비교하면 대략 응답하라 80-90년대 정도로 돌아간 듯 시차가 느껴지는 읍내 거리 분위기이긴 하지만, 이 또한 지역의 모습이고 다름일 것이리라.
어디서든 달리면 바다, 산, 들이 펼쳐진다. 고흥에 와서 가장 명징하게 체감되는 변화가 있다면, 단연 자연에 근접해 사는 삶이 된 점이다.
우후죽순 솟은 고층 빌딩과 콘트리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확 트인 하늘과 바다, 자연광이 그대로 투영되는 숲과 산, 들판을 마주하며 지낸다.
소음과 잡음이 일상에서 멀어졌고 파도, 물결치는 소리, 바람소리, 새 울음소리, 간혹 들리는 확성기 소리가 배경음처럼 가까워졌다.
교통체증 없이 뻥 뚫린 한가로운 출퇴근길은 더없이 평온하다. 맑고 흐린 날씨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하늘, 태양빛의 색감과 구름의 모습, 물때에 맞춰 회색퇸 뻘이 되기도 파랗게 물이 한껏 충만해지기도 하는 바다.
도시의 혼잡과는 전혀 다른 자연이 품은 베리에이션을 곁에 두고, 눈으로 귀로 가슴으로 담고 감탄을 내뱉는다. 지금은 무엇을 봐도 신비로운 허니문 같은 기간인지라 더욱 감탄사가 잦을 것이다.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여름날 맞은 주말. 고흥 반도 라인인 고흥만 수변노을공원에서 야외 난타 공연을 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느지막한 오후 차를 몰아 서쪽으로 불쑥 달려갔다.
공연 뒤로 펼쳐지는 해질녘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따로 무대를 차리지도 않았는데, 주황빛 그라데이션 톤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 노을을 배경 삼아 자체로 절경을 선사하며 공연을 수려하게 장식한다.
이건 다름이라기보단 우위일 것이다. 자연이 무상으로 선사하는 로컬살이의 매력이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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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아래 링크에 오후 10시에 담지 못한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노란색으로 밑줄 친 제목은 뉴스레터에 담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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